• 구로 수출 산업공단

  • 관리자 | 2013.10.16
    예전의 구로공단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지금은 새로운 구로디지탈단지로 명칭을 바꾸고 '입주기업 1만개 시대'로 바뀌었다. 예전에는 영세 근로자가 대부분을 이루었던 이곳이었지만, 요즘에는 일하는 고용인원의 80%가 대졸이상이다.  

    1963년 6월22일,이원만 한국나이론공업 회장(코오롱그룹 창업주)이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찾아가 "재일교포들의 재산과 기술을 도입해 서울 근교에 경공업 중심 수출산업지역을 만들어야 합니다."고 말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경제 근대화를 위한 길을 찾으려는 박 의장의 지시에 따라 일본의 수출산업 현황을 살피고 돌아와서 수출이 경제의 기틀을 다지는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로부터 1년2개월 뒤인 1964년 8월,이 회장과 조홍제 효성물산 회장(효성그룹 창업주),이양구 동양시멘트공업 회장(동양그룹 창업주) 등 기업인 16명은 한국경제인협회 건물에 모여 '사단법인 한국수출산업공단'을 발족시켰고, 이듬해 3월 구로구 구로동 일대 12만평을 산업단지로 개발하면서 시작되었다.

    ◆ 황무지에서 수출입국의 전진기지

    구로디지털단지에 처음 입주한 기업은 1966년 8개사를 시작으로 7개의 재일교포 기업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고, 생산품목은 비닐완구,안경,직물,고무풍선 등으로 그해 수출은 고작 13만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1971년에는 입주기업이 100개를 넘어섰고 1977년 수출 1억달러로 국가 전체 수출의 10분의 1을 이곳에서 담당했다. 당시 공단의 주력은 가발과 섬유 · 봉제산업이었다. 1970년대 초 전체 입주기업의 38%가 가발 제조업체였으나 후반에는 섬유 · 봉제가 35%가량을 차지했다. "1970년대 구로공단의 연평균 수출증가율은 36.5%에 달했고 매년 전체 수출의 10% 이상을 이곳에서 담당했을 정도"라고 당시의 관계자는 회고하고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주력산업이 전기 · 전자로 바뀌었지만 구로공단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했다. 1988년은 구로공단의 최고 전성기였다. 입주 기업이 263개사로 늘었고 수출은 43억달러(전체수출의 7%)에 달했다. 


    ◆ 10년의 쇠퇴기

    역설적이게도 최고 전성기였던 1988년은 쇠락의 시작이었다. 민주화 바람을 타고 불붙기 시작한 노사 갈등은 구로공단 지역 근로자들을 부추기면서, 가파른 임금 상승을 불러왔고 노동집약형 산업이 쇠락으로 이어지면서, 기업들은 해외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수출도 1990년 40억달러에서 1999년 15억달러로 급락했고 같은 기간 고용인원도 5만5000명에서 2만9000명으로 절반가량 줄었다. "1980년대 중반 노조가 생겨나고 대학생들이 위장취업을 하는 등 한동안 공단 전체가 시끄러웠다"며 "그때 노조나 위장취업으로 시끄러웠던 회사는 주변에 남아있는 곳이 한 곳도 없다"고 관계자는 회고했다. 

    ◆국내 최대 IT · 벤처 집합지

    쇠락의 길을 걷던 구로공단이 부활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부터.정부는 1997년 '구로단지 첨단화계획'을 수립,섬유 · 봉제 등 영세 제조업 대신 △고도화기술 △패션 · 디자인 △벤처 △지식산업 등을 이곳으로 끌어들였다. 2000년에는 구로공단이란 이름도 '서울디지털단지'로 바꿨다. 이와 동시에 고도화 작업도 시작했다. 단층짜리 공장 대신 15층 이상 아파트형 공장으로 단지를 재개발한 것.그 결과 아파트형 공장은 2000년 6곳에서 2005년 48곳,올해 83곳으로 늘었다. 연내 완공을 목표로 공사 중인 아파트형 공장도 17개에 달한다. 

    지금은 입주기업의 85%가량이 IT · 지식기반 서비스 · 제조업체이고 전체 고용인원의 80%가 대졸 이상 고학력자로서 국내 최대의 IT · 지식 집적단지로 자리잡고 있다. 2010년 구로디지털단지의 생산은 6조8000억원, 수출은 각각 15억달러를 상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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